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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하고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 그건 게으름이 아닙니다

퇴근 후 소파에서 꼼짝 못 하는 저녁이 왜 게으름이 아닌지, 하루를 다시 세어 보며 나를 덜 혼내는 법을 이야기합니다.

블리 그림 — 밤에창문열고바람맞기

퇴근하고 집에 오면 아무것도 하기 싫은 저녁이 있습니다. 그건 게으름이 아니라, 하루치 힘을 다 쓴 사람의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녁 여덟 시쯤,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소파에 앉아 있는 분이 많을 겁니다. 운동도 가야 하고, 영어 공부도 하려고 했고, 밀린 설거지도 있는데요. 몸은 소파에 붙어 있고, 손은 휴대폰만 넘기고 있지요.

그러다 밤이 깊어지면 이런 생각이 찾아옵니다. "오늘도 아무것도 안 했네."

정말 아무것도 안 했을까요

하루를 처음부터 다시 세어 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을 했고, 사람들을 만났고, 결정을 내렸고, 참았고, 웃었습니다. 퇴근길에는 사람으로 가득한 버스나 지하철을 견뎠구요.

그 모든 일에 힘이 듭니다.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없어서 그렇지, 하루 종일 무언가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저녁에 남은 게 없다는 건, 낮에 다 썼다는 뜻이더군요. 텅 빈 지갑을 보고 "왜 돈을 안 벌었냐"고 묻지는 않지요. 썼으니 비어 있는 겁니다.

저녁의 계획은 누가 세웠나

퇴근 후 계획은 대개 아침의 내가 세웁니다. 아침의 나는 아직 힘이 남아 있어서, 저녁의 나를 꽤 과대평가합니다. 운동 한 시간, 공부 한 시간, 집안일까지, 아침에는 다 될 것 같거든요.

그런데 그 계획을 받아 드는 건 저녁의 나입니다. 하루를 다 치르고 온 사람에게 한 시간짜리 숙제 셋을 건네는 셈이지요.

저도 그런 다짐을 수없이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밤마다 저녁의 나를 혼냈구요. 돌아보면 잘못한 쪽은 저녁의 내가 아니라, 계획을 세운 아침의 나였습니다.

소파에 앉아 있는 시간도 하는 일입니다

몸이 움직이지 않을 때, 몸은 노는 게 아니라 회복하는 중일지도 모릅니다. 휴대폰을 멍하니 넘기는 것도, 아무 생각 없이 창밖을 보는 것도, 하루치 소음을 가라앉히는 방법 중 하나겠지요.

그러니 오늘 저녁에 아무것도 못 했다면, 이렇게 말해 주면 어떨까요. "오늘 낮에 많이 썼구나." "이만하면 됐다."

딱 하나 하고 싶다면 창문을 잠깐 열어 보는 것 정도면 충분합니다. 찬 바람 한 번 맞고, 다시 소파로 돌아가도 됩니다.

내일 저녁의 나에게는 조금 가벼운 계획을 건네 보구요.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당신은 오늘도 충분히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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